* 이 글은 <언어의 정원>의 내용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습니다
- Take me higher
행복에 감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설령 자신이 행복한가, 혹은 어떠한 상태가 행복한가를 이성으로써 규명한다고 하더라도, 감정이 뒷받쳐주지 않는한 이성이 내놓은 답 그 자체에만으로는 만족을 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은 나름나름으로 행복에 참여시키는 감정이 다르다. 일반적으로는 쾌락이나 즐거움이, 드물게는 고독함이나 조용함, 심지어 분노 또한 행복을 행복으로 인지하기 위해 필요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여러 감정 중에서 고양감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이전의 나보다 현재의 내가 더 가치 있어졌다고 확신할 때 느끼는 감정. 나는 올바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주는 그 감정이 주는 행복에 나는 몇 번씩 인생을 찬양하곤 하였다. 사람은 스스로를 극복하여야 하며, 극복의 연쇄는 삶을 징검다리 건너게 해주는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불행하게도 신은 없으며, 따라서 고양감을 수반하는 사람의 성장은 앞으로 나아가는 환상을 주는 사이클 머신과도 같다. 다시 말하자면, 걸음을 내딛든 내딛지 않든 사람의 위치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다. 세상은 레벨로 유저를 나누는 RPG 게임이 아니며, 삶은 단 하나의 정상을 목표로 닦여져 있는 등산로를 걷는 것도 아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성장하고자 하는 사람은 고독하고 유약하며, 방황할 수밖에 없다. 사귈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사람과의 애정도 사귀면서 드러난 그의 결점에 점차 식어간다. 들어가기만 하면 다른 어떠한 것도 부러울 것이 없을 것만 같았던 학교, 직장도 길을 말해 주지 않는다. 살면서 맞닥뜨리는 고통과 슬픔에 익숙해지며 쌓아올린 숙련도 이따금씩 문턱에서 무너져 내린다. 자신이 힘들여 이룬 것에 품었던 자긍심이 시간이 지난 후엔 터무니없는 것에 기인한 알량한 허세였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갈 길 잃은 고양감에 대한 욕구는 여러 형태로 분출된다. 신의 부재를 원망하기도 하고, 자신이 만든 허구의 길이 실재하는 양 스스로를 속이기도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현재 잡을 수 있는 쾌락에 만족하기로 다짐하기도 한다. 한편, 고양감에 대한 욕구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이 글에서 말해진 고양감은 플라톤이 주창한 선의 이데아에서부터 중세 신학, 서구 근대 계몽주의 그리고 현대의 실존주의까지의 계보를 지닌 사상에 부합한다. 그 사상이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제목 <생은 다른 곳에>로 압축될 수 있다. 현재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합목적성을 추구하는 것은, 현대의 사람이 보기엔 정신병의 일종으로까지 치부될 수 있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단 하나의 답을 부정한다. 사람 그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욕망까지 끄집어 내는 광고는 성스러움을 잊어버린지 오래다. 세계 대전 이후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긴 평화는 그동안 사람을 병들게 했던 사상을 겨우 퇴치해 일구어낸 결과로 보여진다.
우습지만 나는 고양감에 대한 갈증을 작품들로써 목을 축인다. 그것은 소설일 수도 있고, 만화일 수도 있으며 애니메이션일 수도 있다. 작품은 철저히 현실과 유리되어 있으며, 멈춰진 시간 속에서 작품의 인물들은 작가가 설정한 합목적성에 다가간다. 나는 작품을 감상하면서 그들의 성장에 감동한다. 작품이 끝난 뒤엔 존재하지도 않은 것에 대한 상실감으로 이루어진 여운을 느낀다. 그리하여 길고 긴 서론을 지나, 나는 드디어 <언어의 정원>에 'Take me higher'라고 외칠 수 있게 되었다
- 완성된 아이와 동경하는 어른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언어의 정원>을 본 자가 있다면, 남자 주인공의 눈을 떠올려 주길 바란다. 어떠한 느낌이 드는가? 나는 그것이 생선의 눈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조금의 물방울이 들어가도 연신 깜빡이는 내 눈커풀과 달리, 온갖 부유물이 떠다니는 물 속에서도 생선의 눈은 감길 줄을 모른다. 비오는 지하철 역에서 초점을 잃은 눈들 사이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남주의 눈은 배경과 유리되어 있었다. 눈과 더불어 절제된 행동, 낮은 목소리는 구두 장인을 향한 남주의 꿋꿋한 갈망을 드러낸다.
여자 주인공의 목소리가 하나카나인 것은 맨 처음 대사에서 알아차렸다. 결코 덕심의 깊이가 얕다고 말할 수 없기에, 나는 하나카나의 가장 자신 있는 위스퍼 보이스를 통해 여주를 구현한 감독에게 벅찬 동지애를 느꼈다.
* 변명
1. 일주일의 시작은 일요일입니다
2. 책 글은 이번주는 쉬겠습니다
3. 이 글은 내일 완성하겠습니다

